4.
다음 보기는 유비가 올린 표문 중 일부다. 해당 표문이 올라온 해는 몇 해인가?
바깥에서 천자의 명을 받들려 해도 예명(禮 命-조정의 책명)이 단절되어 있습니다. 옛날 하서(河西)태수 양통(梁統) 등은 한(漢)이 중흥할 때에 이르러(왕망 말 후한 초) 산하(山河)에 가로막히고, 지위와 권한이 같아 서로 능히 통솔하지 못하자, 모두 함께 두융(竇融)을 추거해 원수(元帥)로 삼으니, 끝내 효적(效績-공적)을 세우고 외효(隗囂)를 격파했습니다. 지금 사직의 어려움은 농(隴), 촉(蜀) 때보다(농서의 외효와 촉의 공손술) 더 급박합니다. 조조는 밖으로 천하를 집어삼키고 안으로 뭇 신료들을 잔멸하여 조정에 소장지위(蕭牆之危-내부의 위험)가 있으니, 어모(禦侮-모욕을 막아냄)하지 않는다면 가히 천하인 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만 합니다.
이에 신 등이 옛 제도에 의거해 유비를 한중왕으로 봉하고 대사마로 삼아, 육군(六軍)을 동제(董齊-영도)하고 동맹을 규합하여 흉역(凶逆)을 소멸(掃滅-소탕)하려 합니다. 한중(漢中), 파(巴), 촉(蜀), 광한(廣漢), 건위(犍爲)를 국(國)으로 삼고, 부서를 설치한 것은 한나라 초 제후왕의 옛 제도에 따랐습니다. 무릇 권의(權宜-임시적인 편의. 임시방편)의 제도가 실로 사직에 이롭다면 이를 임의로 했다해도 가합니다. 그 연후에 공(功)이 이루어지고 일이 세워지면 신 등은 물러나 교죄(矯罪-군주의 명을 가탁한 죄)를 받을 것이니, 설령 죽임을 당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.